12월 기획전_허용성 개인전 <같은 사람 展>
전시기간
2018년 12월 5일 – 2018년 12월 20일 *Opening Reception: 12월 7일 오후6시
전시소개
타, 자화상
그저 타자들의 한낱 이미지일 수 있겠지만, 허용성 작가의 그림을 차분히 보고 있노라면 묘한 상념들이 떠오른다. 그 작은 얼굴에도 세상사의 수많은 삶이 담겨 있을 수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저마다 다른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듯하고, 그렇게 모두 저마다의 사연이 (응당) 있을 것만 같은 느낌들 때문이다. 작가에겐 익히 아는 사람들의 얼굴들이라지만 작가와 특정한 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들에겐 낯선 타자의 얼굴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완전한 타자의 그것처럼 미지의 막연한 존재감으로 다가오지만은 않는 것이다. 어딘지 모르게, 왠지, 어쩌면, 알 수도 있을 것만 같은 우리 시대의 친근하고 익숙한 모습들일 것 같다는 생각마저 하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인 인물화나 초상화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 낯설고 독특하기만 화면상의 전체적인 이미지 효과나 세련된 미감의 회화성이 동시에 눈길을 잡아끌면서 말이다.
이런 느낌들 속에서 유독 긴 여운을 남기는 것은 작가의 그림 속 인물들이 모두 낯선 타인들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저마다의 사연들로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은 느낌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친근함에 바탕을 둔 수다스러움이 아니라, 낯선 사람들인데도 왠지 어떤 말들을 못내 할 것만 같은 느낌들, 이를테면 그저 침묵이 아니라 어떤 말들을 침묵 속에서 전할 것만 같은, 그런 움직임이 서려있는 정적감이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전체적으로 차분한 어조와 분위기를 가진 그림들이지만, 정이동(靜而動), 곧 고요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적막이 아닌 어떤 차분한 목소리들의 화음이 공간 속에 울려 펴지는 듯한 느낌들마저 갖게 된다.
타인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누군가를 식별하고, 인지하고 혹은 미추의 취미판단을 넘어서는 의미심장한 행위이다. 단순히 이미지 상으로 대상을 보는 것만이 아니라 보여 짐의 과정 또한 이루어지는 상호관계의 시선이기도 하고, 서로를 욕망하는 응시의 차원이 결합되거나 타자의 존재론적인 삶까지도 관계하는 복잡한 행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그렇기에 때로는 자기 자신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숨기거나 드러내는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행위일 수 있으며, 타인을 욕망하는 시선이거나 상대방을 제압하려는 권력의 시선까지 교차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작가의 그림에서는 이러한 심리적인 작동들, 이를테면 관계의 정동학이라 할 만한 것까지는 작동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러한 감정상의 문제를 차분히 거리를 두게 하는 몇몇 이미지 효과들 때문인 듯싶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때로는 보는 이를 응시하기도 하지만, 이 조차도 보는 이를 쳐다보는 시선이라기보다는 부끄러운 듯 저마다의 상념에 잠겨있는 것만 같은 시선들이고, 종종 보는 이와의 시선과 엇갈리는 경우들도 있어, 특정한 시선의 관계를 만들지 않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화면 전체에 걸친 탈색된 이미지 효과가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관계들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객관적이고 차분한 느낌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래서인지 뜨거운 이미지 효과라기보다는 오히려 차갑고 정적인 화면들이 도드라지는데, 특히나 탈색된 머리색이나 강렬한 색조의 눈매들이 초현실적인 느낌들마저 만들어낸다. 이국적인 이미지들 같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익숙한 우리내 친구들의 모습들이고, 그 익숙하지만 낯선 모습 속에서 이 시대의 무기력한 젊은이들의 숱한 고민들과 상념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그림에서 담고 있는 작가의 지인들이었을, 이 시대의 젊은 세대들이 고민했음직한 묵직하기만 한 사회적인 고민들이 각각의 개인들의 개성이나 감정적인 표현들보다 더 강하게 전해지는 것이다. 개인의 특이성조차 탈색되고 있는 이 시대의 어떤 상황들을 드러내려 했던 것일까. 필경 작가는 그림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과의 숱한 대화와 촬영을 통해 그런 모습들만을 포착하려 했을 것이다. 무표정하고 덤덤한 이 시대의 어떤 단면들 말이다. 그렇기에 작가의 그림 속에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개개인의 실존적인 고민들, 그 불안한 존재론적인 의미들이 감지된다. 특히나 불안한 사회적 삶의 조건 속에서 고뇌하는 젊은 세대의 실존적인 이미지가 화면 고스란히 투영되고 있어 이미지의 보편성이라 할 만한 것들을 획득한다.
이러한 면모들은 작가 특유의 그림 그리기의 과정과도 연결되어 화면 안팎의 깊이감을 획득한다. 작가의 일상과 삶 속에서 익히 아는 친구들이고, 그런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교감하고,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작업하기 때문이다. 나만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며, 특정한 개인에 대한 접근보다는 좀 더 객관적인 이 시대의 모습과 표정을 담으려 한 것도 이와 연관된다. 그리고 동양화 특유의 지난한 그리기의 과정, 곧 얇게 수없이 덧입혀 화면의 깊이를 만들어 내는 세심하고 정성들인 그리기는 자연스럽게 시간의 층위를 덧입히는 과정인 동시에 작가에게도 긴 사유의 시간을 더하는 과정이었을 것이고, 이런 과정은 다시 부박한 감정의 기복을 추스르고 다독이는 시간들이었기에 작가의 그림이 유독 차분하고 정적인 면모, 세상과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마저 담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여기에 작가 특유의 정리, 정돈의 성품이나 깔끔한 성격은 그림이 갖고 있는 엄정하고 객관적인 느낌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정리, 정돈된 객관적인 느낌조차 더 넓은 시대적인 감성의 차원까지 담아내는 것이기에 차분하고 고요하지만 동시에 어떤 깊이 있는 기운마저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무표정한 표현들이겠지만 그 무심한 표현의 강도가 역설적으로 시대의 특정한 감성의 차원을 더 부각시키고 있는 셈이다. 동시에 사회적 삶에 대한 고민 속에서 창백한 감성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의 삶마저 읽히게 하기에, 지극히 감성적인 느낌마저 획득한다. 그 창백하고 무표정한 모습들 속에 역설적으로 시대의 굴곡 있는 표정들이 읽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의 그림을 그저 이 시대의 고난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초상화라는 객관적인 의미로만 읽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분명 이러한 사회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작업은 무엇보다도 온당한 하나의 회화적인 언어와 감성으로도 전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가의 그림은 일정한 모습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부단한 변화와 실험으로 그 영역과 깊이가 계속 확장되고 있어, 이에 대한 주목 또한 요청된다. 인물화에 머물지 않고, 그 맥락을 달리하는 확장의 노력들이 우선 그러하고, 작가 특유의 섬세한 손 솜씨를 살린 소품의 활용이나 음향작업의 결합에 대한 향후의 고민과 시도들이 그런 모습일 것이다. 그동안 작가가 창백하고 무표정한, 하지만 세심하고 세련된 감성표현이 절묘하게 궁합을 이룰 수 있는 얼굴 그림으로 일정한 작업 스타일을 획득했었다면, 그 고정된 스타일에 머물지 않는 변형의 노력은 쉽지 않은 모색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이야 말로 작가가 담아내려 한 이 시대의 젊은 세대가 품고 있는 진정한 모습이라는 면에서, 작가의 그림은 다양한 맥락에서 시대적인 층위를 담아내는 작업으로 상승한다. 저 창백한 표정의 얼굴 형상은 비록 얇은 평면성의 가벼운 이미지일수 있겠지만, 작가의 그림 그리기 과정 자체가 그런 것처럼 그 이미지 안에도 삶에 대한 나름의 깊이들을 쌓아왔던 것이고, 그렇게 현재의 불안만이 아니라 미래의 다양한 가능성을 향한 지반 또한 품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에서 볼 수 있고, 느껴지는 기성 사회의 구조 속에서 탈색된, 무표정한 이 시대의 젊은 세대들의 얼굴 이미지는 실은 작가 스스로의 얼굴이자 그 이야기일 수 있음을 유추할 수 있게 된다. 그 기본적인 문제의식과 감성대를 작가 스스로가 공감할 수 있었기에 마치 거울을 통해 또 다른 자기 자신 속을 보는 것처럼, 거리감 있는 객관적인 시선 속에서 그 깊이감 있는 표정들의 세심한 디테일을 살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비단 솜씨 있는 화력과 표현력만으로 성취되는 것만이 아닐 것이다. 삶으로부터 깊숙이 체득한 어떤 공감들이 바탕이 되어야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젊은 세대의 정체성이나 존재론을 담는, 흔한 시도들의 하나인 해체나 재구성, 혹은 일그러진 표현들이 아니란 점도 주목을 요한다. 비록 고뇌하고 번민하는 젊은 날들의 모습들이겠지만, 이를 마치 작가 자신의 삶이 그런 것처럼 좀 더 차분하게 응시하고, 그 객관적인 이미지들 속에서 스스로를 성찰하고 반성하는 모습과 태도들을 드러내려 했던 것은 아닌지, 마치 사진이 담을 수밖에 없는 그때 거기 있었음의 객관적 존재론이나 지극히 구체적인 현실성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더욱 정련하고 세련된 삶의 과정 속에서 이를 다른 스타일의 미감으로 완성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되물어 보게 된다. 작가 스스로의 작업 과정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보자면 작가가 드러내는 이미지의 구체적인 현실성은 그림에서 보이는 이미지 이상의 맥락을 만들어가는 다양한 과정과 노력을 통해서도 획득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작업과 개인의 삶을 분리하지 않았던 동양적인 미감이나 정신들 말이다. 단지 재료나 기법상의 구분에서 말하는 동양화나 한국화의 그것 때문이 아니라, 작업과 삶의 태도를 일치시켜가는 회화 본연의 어떤 근본적인 정신들과 덕목들을 작가는 꾸준히 몸에 익히고, 실천하고 있는 것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작가의 지극히 동시대적인 미감과 표현 스타일에서 묵직한 힘을 느꼈던 것도 이와 연관된다. 그렇다면 회화의 근본문제는 표면적인 이미지의 작동이나 효과로 가시화되는 문제만이 아니라 그 이면의 비가시적인 힘이나 맥락마저 함께 드러내는 것일 것이다. 작가의 작업 또한 우리 시대의 그림이 그저 얇은 회화적인 평면성, 혹은 가시적인 이미지만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 이미지의 평면성조차도 작가의 세상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과 성찰로서 다시 담아내고 표출해야 하는 문제임을 다시금 전한다. 그렇게 작가는 타인들의 얼굴들을 통해서 그저 타자들의 이미지에 대한 관찰과 표현만이 아닌, 그 속에 투영된 자신의 삶에 대한 고민과 사유를 드러내고, 이를 그려내는 과정 속에서 성찰되어진 어쩌면 스스로의 얼굴이었을 이 시대의 어떤 표정과 몸짓들마저 담아내려 했었던 것이다.
■ 민병직 (대안공간루프 부대표,전 문화역서울 284 전시감독)



